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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리펑으로 보는 태국 크리에이티비티

2012-02-24 14:49:29


태국의 크리에이티비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광고 하는 사람들은 일단 웃음부터 짓는 경우가 많다.


2000년대 이르러 태국은 독특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로 아시아 크리에이티비티의 한 축으로 부상했다. 특히 기발한 유머 감각은 태국 크리에이티비티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태국이나 인도와 같은 아시아 국가들이 크리에이티비티 업계의 떠오르는 별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이나 유럽 등 크리에이티비티 선진국에서 모바일이나 사이버 캠페인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인쇄나 필름과 같은 전통 미디어 캠페인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을 한 이유로 들기도 한다.  이에 반해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국가들에게는 아직도 인쇄, 필름, 옥외 광고가 가장 중요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통 매체가 주류인 나라는 태국 이외에도 많다. 단지 전통 매체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만으로는 태국 크리에이티비티의 폭발적 성장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차라리 이 나라가 오랜 세월 고유한 문화를 유지∙발전시켜왔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2007년 칸 라이언즈 인쇄 부문 동상작 "오징어"

이 독특한 나라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 제국주의 시대, 인도차이나 반도를 열강들이 케이크 자르듯 나눠먹을 때도 독립을 지켜왔다. 태국인들은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할 당시 ‘8시간’ 동안 군대를 점령당했던 것이 유일한 치욕이라고들 한다. 그들은 ‘휴전’이나 ‘항복’을 하지 않고 ‘정전’ 선언을 했다.

2006년 쿠데타에 이어 한 동안 격렬한 시위가 있었고 최근에는 온 나라를 뒤덮다시피 한 홍수마저 겪긴 했지만, 사람들은 태국을 ‘놀러 가기 좋은 나라’, ‘태평스럽고 선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의 나라’로 생각해왔다.

현재의 삶이 힘들면 다음 삶에서 보상받을 것이라 믿는 낙천적인 남방불교의 내세관도 태국의 평화스러운 이미지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건 아닌가 싶다.

고대에는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며, 불교 승려가 태국 고유의 문자를 만들었으며, 모든 국민이 생애 한 번은 승려가 되어 수행을 한다는 나라. 그런 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다면 관객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태국 광고들의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추론하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태국에는 몇 명의 특출한 크리에이티브가 있다. 그 중 주리펑 주디 타이덤롱(Jureeporn Judee Thaidumrong)은 태국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크리에이티브 중 한 사람이다. 

2012년 작 "유괴(Kidnapping)"

올해 만들어진 방콕 대학 캠페인인 ‘유괴(Kidnapping)’는 그의 스타일을 한 눈에 보여주는 필름 광고이다. 시대를 앞서 가는 천재들이 연달아 납치된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 급기야 스티브 잡스마저 천사에게 끌려간다. 그리고 방콕 대학의 졸업식 장면. 여기서 납치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젊은이들의 가장 큰 고민인 ‘취업’을 ‘납치’로 비유한 재치도 뛰어나며, 잡스 역시 천재성 때문에 일찌감치 신에게 ‘스카우트’ 된 것으로 표현한 유머 감각이 무릎을 치게 한다. 

2000년 칸 라이언즈 인쇄 부문 금상 수상작 "담배(Cigarette)" 

업계에서 ‘주디’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주리펑은 2000년 “담배”라는 제목의 타바스코 인쇄 광고로 일찍이 칸 라이언즈 금상을 받아냈다. 

이후 매해 칸 라이언즈에서 금상을 포함해 많은 상을 받아온 주리펑은 2005년 방콕에 Jeh 유나이티드(Jeh United)라는 대행사를 설립하고 이어 2006년 칸 라이언즈에서 “스무드 E(Smooth E)” 캠페인으로 또 다시 금상을 받아낸다.

이것을 계기로 전세계 크리에이티비티 업계는 이 엉뚱한 여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만화 속 주인공들이 튀어나온 듯 과장된 설정으로 관객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든 이 캠페인은 칸 라이언즈 이외에도 각종 국제광고제를 휩쓸었다. 


스무드 E 캠페인 중 제 1편 

스무드 E 캠페인 시리즈는 아직도 장난꾸러기 소녀 같은 느낌의 주리펑과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2008년 또 다시 칸 라이언즈에서 금상을 받은 “소풍(Picnic)”은 이와 전혀 다른 분위기다. 

태국 민담 속 귀신들을 마주한 평범한 – 초라하리만큼 – 가족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자. 고지식하고 꽉 막힌 어느 나라의 어느 광고주에게 제안했다면 “우리 소비자들을 이렇게 초라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고 거부했을 수도 있겠다. 


2008년 칸 라이언즈 필름 부문 금상 수상작 "소풍(Picnic)" 

그러나 주리펑이 늘 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 태국의 현실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태국은 이전에 겪지 못했던 고난을 연달아 겪어야 했다. 평화로운 불교신자들의 나라가 소요와 쿠데타의 나라, 부정부패와 매춘의 나라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2010년 주리펑은 “미안해요 태국(Sorry Thailand)”이라는 캠페인을 통해 갈갈이 상처 입은 태국인들을 보듬으려 애쓴다. 심의와 검열로 방영이 어렵게 되자 매체들은 오히려 더 이 캠페인에 대해 더 크게 다뤘고, 덕분에 이 캠페인에서 전하는 메시지도 성공적으로 전달됐다. 


"미안해요, 태국(Sorry, Thailand)"

2008년 이후 한 동안 크게 웃지 않았던 주리펑. 그녀가 방콕 대학 캠페인으로 다시 큰 웃음을 안겨줬다. 머지 않아 다시 칸 라이언즈 시상식 관객들을 박장대소 하게 만드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사진제공=칸 라이언즈 한국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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